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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치

     네가 차를 무서워할까 봐 차가 많이 다니는 고속 도로 옆에 집을 지었다. 네가 기차를 무서워할까 봐 가장 빠른 고속철 옆에 집을 지었다. 네가 굉음(轟音)을 무서워할까 봐 우르르 포탄이 구르는 고가 도로 밑에 집을 지었다. 네가 열 길 물속을 무서워할까 봐 폭포 옆에 집을 지었다. 모두 너를 위한 거다. 우리는 알에서 깨어날 때  작고 동그랗게 웅크려 있던 무서움마저도 다 부숴 먹었다. 까짓것 우리는 까치다.  어차피 우리는 헤어진다.  엄마 아빠는 죽음보다는 견딜 만한  이혼을 선택했다. 가족끼리는  말하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모든 아픔도 사랑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엄마 아빠 중 하나를 택하라. 언제나 틀린 답은 없다. 조금 덜 불행한 쪽만 있다.- 이정록, 「까치」* 소명여고 조권희 선생님의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너무 역동적인 사연이 많지만, 현재 저의 학급은 소소한 사연이 많네요. 아이들로부터 기억에 남는 내용을 받아서 '시'에 응모한 만큼, 잘 부탁드립니다. ^^)    처음에 고2에 올라올 때는 고2가 특별히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불화와 부모님 중 한 명을 택해야 한다는 선택이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할 줄은 몰랐다. 고2가 되어서인지, 집에서의 생활이 괴로워서인지 뜻하지 않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작년 반을 뒤로하고 새로운 환경에 처해서인가, 어색한 분위기를 맞게 되어서인가 이런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 친구들과의 친밀도는 높아지는 반면, 이상하게 학교생활을 하기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아빠로부터의 연락을 받았다. 아빠 회사가 부도가 났을 때 내가 태어나서 다시 살아갈 희망이 생겼었다는 말,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기억을 맴돌았다.    모든 것에 무기력해지고 살 이유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고, 아빠의 지지가 내게는 큰 힘이 되었다. 이혼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 안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온전히 나이기에 어서 이 고통을 벗어나고 싶다. 어느덧 아빠를 의지하며, 아빠를 하루하루 보고 싶은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창밖에는 비가 조금씩 내리는데 어느덧 야자 시작 조금 전이라 약간 바깥이 어두웠다. 커튼을 반만 쳤더니 비가 내리는 게 다 보였다. 교실은 에어컨을 약하게 틀어서 조금 추웠고 교실 뒷바닥에 누워서 친구들과 노래를 들으며 농땡이 부리던 평화로운 시간, 이 시간이 온전히 지나가기를, 그리고 집에서도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나날이 빨리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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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나저나

     감자, 애호박, 미더덕, 바지락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그만인 것들이 식어도 맛있는 된장찌개를 만든다.  양파, 홍합, 오징어, 박하지가 짬뽕의 마음이 된다. 종달새 미경이, 토끼풀꽃 선미,  머루알 금삼이, 빨강 채송화 종숙이.  그나저나 밥은? 그나저나 애들은? 그나저나 시어머니는? 그나저나 저나 그나 어때? 해도 좋고, 안 해도 다 아는 말이 응달 바람벽이 된다. 오목눈이 옥란이, 방아깨비 현숙이,  카멜레온 문희, 알 둥우리 은주.  애기원추리, 병아리난초, 은방울꽃, 씀바귀. 없어도, 있는 듯 향기롭고  있어도, 자랑하지 않는 꽃들이 그나저나, 그렇지 뭐. 입술 실룩대는 토끼의 슬픔과 고삐 묶인 염소의 아픈 되새김질을 다소곳이 풀밭에 누인다.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이 사람들이 팔 할의 장꾼이 되어 윷도 놀고 풍물도 치고 맥주도 돌린다. 삶은 파장으로 갈수록 아름답다. 흥정도 없이 서로서로 떨이해 준다. 파랑새 옥자, 달팽이 아가씨 혜진이, 햇병아리 현주, 타래난초꽃 상현이.  다 같이 놀자! 골목 아씨 현자. 혜진아 나와라. 숨바꼭질 끝났다. 우리는 모두 수다 학교 동창생들이다. 눈보라 치는 북향집에도  수다가 동창을 밝힌다. 그나저나, 세상에는 와도 그만, 가도 그만인 늙은 사랑이 꼭 붙어서  골목길 가로등을 환하게 밝힌다. 그나저나, 그렇지 뭐. 미더덕처럼 올통볼통한 입술을 내민다. - 이정록, 「그나저나」* 호곡중 류현자 선생님의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개성 넘치는 여고 동창생들과 함께 늙고지고> 여고 3학년 친구들이 오랫동안 연락을 못 하며 살다가 우연히 카톡 단체 대화방에서 만나 자주 일상사도 나누고 또 봄가을로 한 번씩 여행을 가며 만난 지 4년이 되어갑니다. 쉰이 넘어가는 나이지만 우리는 카톡 단체 대화방에서는 아직도 까르르 웃고, 어떻게 해? 어떻게 해? 하며 서로 걱정해 주는 영락없는 여고생들! 그러던 중 작년 연말에 제가 대화방에 있는 동창생 열두 명의 특성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상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으나 한 명 한 명 머릿속에 그려보며 즐거웠네요.    ‘3학년 4반 대화방 불 댕김상’ 미경이, ‘약한 것 같으나 실은 강한 이삔 여자상’ 금삼이, ‘눈물 나게 웃으며 잘 치고 잘 빠지는 인생 언니상’과  ‘감정 풍부 진심상’ 2관왕 선미, ‘발랑 까졌으나 귀여운 & 선한 사마리아인상’ 종숙이, ‘이리 봐도 미인, 저리 봐도 미인 최다 출석자 팔방미인상’ 옥란이, ‘예쁜 오지랖, 이리 번쩍 저리 번쩍 정길동상’ 현숙이, ‘깜짝 놀랐다 네 양파 본능상’ 문희, ‘강남 엄마 안 부럽다 강북 엄마상’ 은주,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내공 1,000점상’ 상현이, ‘꽃 복 터진 웰빙 라이프상’ 옥자, ‘깔깔 나비상’ 현주, ‘느림의 미학 신사임당상’에 빛나는 혜진,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 오지랖 하는 우윳빛 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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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꿀꿀

     그을린 옥수수 뿌리 같이 수염이 덥수룩한 할아버지가 혹시, 그쪽도 돼지를 기르시나? 묻는다. 제사상 돼지머리처럼  빙긋이 수염자리만 긁고 있었더니, 돼지는 수염만 봐도  식구인 줄 안다고 따라 웃는다. 눈인사만 건네려다가 멧돼지 같은 놈들과 살 비비며 사는 고등학교 선생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박철주가 손자 돼지라며 덥석 손을 잡는다. 방학 때 아니라도  돼지털 시대니까 수염을 기르란다. 공부는 어찌 가르치는지 모르지만 수염자리 하나는 멋지다며  연거푸 막걸리를 따른다. 늙은 씨돼지 두 마리가  오래도록 삼겹살집에 앉아  새끼돼지 자랑에 꿀꿀거린다.- 이정록, 「꿀꿀」* 천상고 손규상 선생님의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교사와 학부모 어제는 딸 연우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준비한 ‘아빠와 함께 떠나는 북 캠핑’에 다녀왔다. 아이가 미리 가지고 온 가정통신문에는 편한 옷차림 말고는 어떤 준비도 필요하지 않으며 특별한 저녁 식사가 마련되어 있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유치원이 집과 가까운 거리라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 사이를 한가롭게 걸어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선생님들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자리를 안내했다. 정원 한 켠에서는 선생님들이 땀을 흘리며 고기를 굽고 있었고 또 다른 선생님들이 구워진 고기를 자리로 날랐다. 특별한 저녁 식사라고 하기에 아이와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예쁜 도시락 정도를 생각했던 나는 선생님들의 감정 노동에 다소 불편했다. 여기에 겹쳐지는 비슷한 풍경이 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매년 5월 교내 체육행사를 바비큐 파티로 마무리한다. 거기에 붙는 제목도 근사하게 ‘사제동행 바비큐 파티’이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고기를 구워 먹으며 서로를 도닥이는 자리이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학부모님들이 함께 자리하기 시작했다. 학부모님들이 고기를 굽고 교사와 학생들은 그 고기를 받아 먹는다. 내가 고기 굽는 자리를 차지하려 해봐도 학부모님들은 완강하다.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교사로서 학부모님과 삶을 나누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 나도 학부모님을 만나다 보면, 동네 형님으로 만나서 사는 이야기 나누면서 맥주 한 잔 나누고 싶은 학부모님이 분명 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내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 대한 조언을 받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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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창문을 열며

     모래 폭풍 몰아치는 사막을 걸어 너는 갔다 모래바람에 묻혀 지워지는 너를 보았다 생을 향해 이글거리던 완전 연소의 불꽃으로 연기도 재도 남기지 않은 그리하여 네가 가 닿은 곳은 어디냐 바람이 분다 너의 숨소리를 듣는다 뜨는 별에서 네 눈망울을 본다 네 미소로 해가 솟는다 여기에 네가 있었구나 비로소 네가 닿은 그곳이 여기 우리 가슴인 것을 알겠다 너는 이 세상 우주에 가득하구나 초록으로 오는구나 눈으로 오는구나 가랑비가 되어 오는구나 살아야 할 이유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알려주듯 지금은 없는 네가 내 곁에 있구나 내 안에 있구나 헤어짐은 이렇듯 하나가 되는 일이었구나 우리 갈 길이 모래 폭풍 속일지라도 이제 못 갈 일도 없겠다 너 내 안에 숨 쉬고 있으므로 나 오늘 다시 창문을 연다 내일은 네가 뿌린 씨앗들에 물을 주겠다- 복효근, 「다시 창문을 열며」*계산여고 이정희 선생님의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3월 20일 새벽 두시 반에 사랑하는 막내 여동생이 어린 두 딸을 두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화장장에서는 꽃을 시샘하는 봄눈치고는 꽤 많은 함박눈이 펑펑 흩날렸습니다. 딱 2년 전 3월 20일 쯤, 계산여자고등학교로 옮기고 3학년 3반 아이들의 담임이 되어 정신없이 바빴던 그 때 동생이 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수업 때문에 바로 동생에게 달려가지도 못하고 교무실에서 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주변 선생님의 염려도 귀에 잘 들리지 않고, 아이들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들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동생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도 잘 알지 못했지만, 모두들 정신을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장녀인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제부가 동생을 데리고 여기저기 병원을 옮겨 다닌 끝에 그렇게 생소한 급성 T림프성 혈액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엄마, 아빠와 저 그리고 둘째 여동생은 걱정과 염려와 슬픔으로 남겨진 어린 아이 둘을 돌보고 돌아가며 병원에 가서 간병을 하며 보냈습니다. 고 3 담임으로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여학생들이라 예민한 감정을 많이 다독여 주어야 했지만, 병원에 가서 아픈 동생을 보고 오면 쓰라린 가슴 때문에 수업 시간에 이별시라도 가르칠 때면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습니다. 1년 동안 제 슬픈 감정으로 주변이 우울해 지는 것 같아 3학년 3반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교무실에서도 다른 선생님들께 너무 미안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졸업식에서 바라 본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밝지 못한 것 같아서 씁쓸하고 마음이 아파, 울면서 아이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아픈 마음을 배려해 주어 작년에는 담임을 맡지 않았습니다. 동생도 항암을 끝내고 골수 이식을 하고 왠지 희망이 생기고 해서 암이 재발하기 전까지 새로 맡은 새학년의 아이들에게 정도 듬뿍 주고 학교에서는 동생의 일을 잠깐 잊고 웃으며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동생이 금방 암이 재발되고, 바쁜 와중에 제부가 살려 보려고 한국의 큰 병원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저도 사람인지라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해도 금세 일희일비하는 제 자신을 보며 자탄하다가도, ‘냉정해지자, 슬픔을 극복해 내던 많은 이들처럼 내게 일어난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설마 아직 내 동생은 너무 젊은데 이겨내겠지.’ 이러며 스스로 달래보고, 동생의 투병 생활에 힘이 되려고 주말이면 부지런히 동생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두 해 동안 저는 제가 시간을 앞질러 가는 것 같았습니다. 충격이 크신 엄마, 아빠도 걱정되고, 어린 조카들도 걱정되고, 고만고만한 두 아들을 키우는 둘째 여동생도 걱정되고, 일하랴 병간호하랴 자기 몸을 못 챙기는 제부도 너무 걱정되었습니다. 항암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나면서 슬슬 병원비도 걱정되기 시작하고, 일흔이 넘으신 부모님도 걱정되었지만, 가장 걱정이 됐던 것은 막내 동생이 병원에서 그렇게 오래 입원하고 치료하고 다시 이식 받고 하는 반복의 과정에서 자꾸 더 아파지고 입원 기간도 길어지고 더 항암을 할 수 있는 체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는 계속 두 달밖에 남지 않았어요라고 하지만 동생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서 그 무시무시하게 아프다는 항암을 마지막까지 받아가면서 정말 살고 싶어 했습니다. 엄마 품이 아직은 너무 그립고,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둘째 다인이를 조금만 더 키워 놓고 갔으면 하던 힘없는 동생의 목소리,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자신의 생명이자, 보물이자, 사랑이라고 말하던 첫아이의 이름을 말라비틀어진 혀로 ‘이랑아이랑아이랑아’라고 외쳐 부르던 소리가 아직도 제 귀에 선명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살고 싶어 하는 동생에게 차마 더 살 수 있다고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기만하는 것 같아서.. 그러나 지금 후회합니다. 방학 동안에 같이 있으면서 더 잘 해 줄 걸. 아프기 전에 동생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도와 줄 걸. 사랑한다고 더 많이 얘기해 주고 아직도 나 예쁘냐고 물을 때 당연하지 네가 제일 예뻐라고 진심을 다해 말해 줄 걸. 개학이 되어서 학교로 돌아갈 때 동생이 그렇게 붙잡았는데, 가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가버리라고 하니 진짜 그냥 와 버린 것이 죽을 것처럼 가장 후회됩니다. 올 3월만이라도 그냥 함께 있어 줄 걸. 나중에 팔, 다리가 모두 마비되고, 혀도 안 움직이고 급기야는 눈도 멀고, 대뇌까지 암이 퍼졌다고 했을 때는 이미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아파보이는 동생이 불쌍하고 가엾어서 가만히 동생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지었습니다. 이제 가도 돼 정희야.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너무 이기적이고 무능했던 언니가 너무 미안하고, 정말 사랑하고 우리랑 살아줘서 고마워. 우리 가족들 모두 너를 사랑하고 이제껏 표현하진 않았지만 네가 태어날 때부터 널 사랑했었어. 더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손 쓸 수 없는 순간 숨이 한 고개 두 고개 넘어 갈 때 네가 하루라도 더 살 수 있기를 희망하지 못해 미안해. 네 아픔의 일도 나눠 갖지 못하고 내 아픔에만 괴로워해서 미안해. 동생이 잠깐 저를 보고 웃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후에 먼저 가 있어라. 나도 가마. 그때 널 꼭 찾을게. 그러며 피딱지가 앉은 동생의 마른 입술에 놓여 있던 거즈가 무거워 보여 들어내는 순간 동생은 마지막 숨을 삼켰습니다. 그 순간 목 놓아 울고 싶었는데, 쉰 목에서는 제 맘처럼 소리도 나와 주지 않았습니다. 만 서른여섯 너무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정말 착하게만 살아온 동생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만 남았습니다. 아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지만 그냥 또 살아있는 죄로 살아갑니다.  학교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즐거운 척, 신나는 척 이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래도 가끔 우울한 그림자가 가득해도 표 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저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나 봅니다. 솔로로 살며 늘 철이 없던 내가 언제 어른이 되나 했더니.. 흰머리 듬성듬성해진 사십 대 중반에 인생에서 가장 큰 사막을 건넌 듯합니다. 앞으로도 건너야 할 모래 폭풍이 인생에 많이 남았겠지요. 수많은 시에서 보았던 이별의 성숙을 이뤄 보려고 애쓰며 참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깊고 넓어진 마음으로 대하려고 합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 지 생각해 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하며 더 좋은 선생님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아직은 가슴의 구멍이 커서 감정이 들쑥날쑥 한데, 그냥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좋은 우연이 인연으로 되어 만난 선생님께 글을 띄웁니다. 감정이 복받쳐 쓴 글이라.. 좀 엉망입니다. 그래도 좋은 시로 만들어 주신다니 평생 보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좋은 기회를 주시고 좋은 인연을 맺게 해 주신 창비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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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쌍자음 속에는

     ‘ㄲ’을 보고 있으면 마음 꼬부라진 내 등을 누군가 다가와 두드리는 것 같다. 그가 어깨를 토닥일 때마다 꿈, 깡, 꼴, 꾀, 끈, 끼, 꾼이란 삶의 열쇠가 눈을 뜬다. ‘ㄸ’을 쳐다보고 있으면 활짝 핀 꽃 두 송이가 꿀벌을 부르는 것 같다. 손잡고 높이 오른 두 사람이 멀리 내다보며 기뻐 소리치는 것 같다. 목젖에 햇살이 들이치는 것 같다. ‘ㅃ’을 굽어보고 있으면 꿈 보따리 위에 놓인 밥 두 그릇이 보인다. 네댓 숟갈 서로에게 나눠 주는 활짝 웃는 잇몸이 보인다. 똑같이 줄어드는 빈 그릇이 빛난다. ‘ㅉ’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난봄 꽃대궁과 한여름의 이파리와 늦가을 알찬 열매를 다 바치고 뿌리만 꼭 껴안고 겨울을 나는 희망의 갈무리가 보인다. 믿음의 뿌리가 당차다. 우리는 ‘ㅆ’이 되어 손을 맞잡고 봄으로 간다. 도토리 키 재기처럼 어깨를 친다. 어미 부리를 기다리는 알껍데기가 아니다. 서로 어깨를 칠 때마다 싹이 튼다. 땅속 깊은 데부터 발자국 소리를 채운다.- 이정록, 「쌍자음 속에는」* 자운고등학교 박용숙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목요일 7교시 수업 시간은 1학년 9반이다. 오늘도 9반의 대부분은 일어서 있을 거다. 2교시와 3교시에 든 날은 제법 멀쩡한데, 7교시만 되면 더 시끄럽다. 더구나 7교시는 교과서 진도를 나가는 수업 시간이다. 시작종에 교무실을 출발해 교실로 향한다. 3층 복도의 끝에 있는 9반 교실에 가는 동안 두 개 반을 거친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서 교실로 향해야 할 학생 중 거슬러오는 녀석이 있다. 대개는 재효다. “물 빨리 먹고 가도 돼요?”, “그래, 얼른 와.” 이미 물 마시러 온 녀석에게 “안 돼!” 해 봐야 관계만 나빠진다. 재효는 9반 학생 중에서 가장 분노가 많아 보인다. 노래를 좋아해서 흥얼거리는 태호, 수업 첫날 “수업 안 할 건데요.”하던 경환이, 스프레이 뿌리던 대준이도 있지만, 그 넷 중 행동이 가장 거칠다. 목요일 3교시 9반 수업은 과정 평가로서의 수행 평가 시간이다. 말하기, 글쓰기, 매체 활용 등을 한다. 오늘 3교시는 수업 시간 토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토론자의 자세를 담은 영화를 보았다. 학생들은 영화를 보며 12명의 토론자에 대해 활동지를 적어야 했다. 재효는 어느새 슬그머니 엎드려 잔다. 재효를 두 번을 깨웠고, 세 번째 엎드려 잤을 때 교실 뒤로 나오도록 했다. 일어서면서 의자를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뺀다. 갖고 나와야 하는 책상 위의 물건도 거친 행동으로 집는다. 서 있는 책상에 나와서는 영화가 재미없다고 투덜댄다. 아놔……. 걸을 때 보면 터덜터덜 걷고, 의자에 앉은 몸은 거의 늘 뒤로 45도 이상 젖혀져 있다. 그래도 어느 틈에 활동지는 대충이라도 해 놓아서 가까이 가 보면 다하고 노는 거라고 한다. 거친 표현과 행동 때문에 교무실에 와서 약속 종이도 쓰고 갔다. 특별실 청소도 두 번이나 했다. 원래 한 번이었는데,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아 한 번이 늘었다. 처음에는 얄미웠는데, 그 녀석에게 집중하다 보니 나름 재미있는 점도 발견했다. 활동지는 빠뜨리지 않고 다 채워 놓는다는 점. 내가 벌점을 줄까, 인성지도부에 데려갈까,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얌전해진다는 점이다. ‘그래 그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 학교에 잘 나오잖아…… 활동지는 다 하잖아…… 그래도 금방 반성하잖아……’ 나는 또 7교시 수업에 재효가 어떨까, 하고 수업에 들어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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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쩜 우린

     가장 가깝게 가장 멀구나 우린 등을 맞대고 있기에 서로 반대쪽을 보고 있다고 모두 적은 아니지 등으로 전해지는 뜨거움과 꿈틀거림 너도 참 치열하게 사는구나 어쩜 우린 한편일지도 몰라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세상에 맞서 서로의 등 뒤를 막아 주고 있다고- 이장근, 「어쩜 우린」* 일산동고등학교 김미진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올해 1학년 중에 참 힘든 반이 있다. 수업 시간에 핸드폰으로 게임을 한다. 교과 담당 교사가 핸드폰을 교탁 위에 두려고 하면 시계만 봤다 등등 이유를 대며 선생님들과 마찰을 일으킨다. 매시간 큰일을 보러 화장실을 가겠다고 해서 참으라고 하면 그런 것을 어떻게 참느냐며 대든다. 쉬는 시간에 몰래 학교를 나가서 사 온 컵밥을 수업 도중 먹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 사방팔방 돌아다니기도 한다. 점심시간 식당 앞에서 새치기를 예사로 한다. 심지어 며칠 전 수업 시간 중 몇몇 녀석이 수업 시간 중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규칙, 예의에 대해서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고 어쩌다 저리 못 배웠을까 짠하기도 하다. 어제 그 아이들과 함께 동아리를 해 보았다. 나는 교과 담당 교사로서 참관했고 동아리를 많이 해 본 선생님이 진행했다. 선생님은 사소한, 예사로운 일 하나도 넘기지 않고 고마움을 표시한다. “자리에 앉아줘서 고마워요.”, “카드를 나눠 주어서 고마워요.”, “의자를 세 개씩이나 나눠 주어서 고마워요.” 등등……. 한 시간 동안 선생님은 꽤 많은 칭찬을 던진다.  처음에 산만하던 아이들이 차츰 선생님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불안함에 감정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아이들이 학급에 대한 느낌을 나누고 수업에 대한 느낌을 나누며 차츰 집중한다. 심지어 끝날 무렵 아이들에게 카드를 모으는 도움을 구하니 모든 학생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카드를 모은다. 5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모습을 보며 여러 마음이 들었다. 말하다 울어버리는 몇몇 아이들을 보며 ‘너희들이 참 힘들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담임 교사인 양 행동하는 아이를 보며 ‘저 녀석은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쪽 눈이 실명 직전인 아이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학교에서 얼마나 될까.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시간은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들으라고 강요만 하던 게 문제는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것인지, 일방적으로 들어주기만 하는 공간이 학교는 아닌데, 어떻게 해야 올바른 교육이 가능한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되는 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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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나무

     길을 가다 작은 나무를 만났습니다 어쩌자고 풀도 아니면서 보도블록 틈에 그것도 사람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길에 어린나무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나무는 좁은 곳도 아랑곳없이 뿌리 내리는 소임을 다합니다 나는 돌멩이를 주워 와 지나는 발길에 차이지 않게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좁은 곳을 택했지만 뿌리가 튼튼해지면 옮겨져 무성하게 자랄 느티나무입니다’ 이름표도 달아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돌멩이 울타리를 보고 이름표를 보고 작은 나무가 다칠세라 살얼음을 딛듯 사뿐사뿐 조심조심 건넙니다 잘 자라라는 덕담까지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나무 하나가 자라려면 얼마나 많은 순간이, 손길들이 지켜주고 응원해 줘야 하는지를 우리 또한 수많은 순간, 지켜준 손길들로 인해 그곳에 있었고 또 이곳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작은 나무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보도블록 틈새 나무든 정원에 심어진 나무든 우람한 나무로 서게 될 날을 그리며 지켜보는 사람입니다 느리지만 끝까지 다독이며 같은 길을 갈 친구입니다 아이라는 꿈나무, 사랑이라는 나무, 우정이라는 나무, 삶이라는 나무 우리는 나무를 가꾸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사랑나무에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것을 압니다 그늘이 되고 품이 되고 손길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보듬을 것입니다 사랑나무 앞길을 노래로 축복합니다 인연이라는 뿌리에 스민 손길들을 축복합니다 두 손 모아 축복합니다 오늘을 축복합니다!- 김미희, 「사랑나무」* 첨단고등학교 조미형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저는 결혼 전 2006년~2010년까지 첨단고에 근무하다가 최근 2017년에 다시 첨단고에 근무합니다. (광주는 교사가 순환해서 근무해야 함.)   2007년 1월에 결혼을 한 저는 당시 1학년 11반 담임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반 아이들 40명 모두가 교복을 입고 와서 깜찍한 결혼 축가를 해 주었지요.  그때 노래를 불렀던 우리 반 아이 중 한 명,  그 아이는 다시 고3 때 반장과 담임으로 인연을 맺었지요. 그 학생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이제 12월에 결혼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아이의 결혼식을 의미 있게 해 주기 위해 생각한 것이 있어요. 이제는 반대로  저와 저희 남편이 축가를 준비해 주기로 했습니다. (저희 남편은 시립합창단원 바리톤입니다.)  제자의 결혼식 날 풋풋했던 신부의 모습 영상과 저의 감동 멘트를 하기로 했어요. 그때 작가님이 지어주신 시를 낭송하고 싶어요. 긴 글보단 함축적이고 의미 있는 시 한 편이 더 감동일 듯합니다. 참고로 이번에 결혼하는 그 제자는 저처럼 학생과 함께 장난도 치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교사를 꿈꿔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 내내 노력도 열심히 하고 늘 제 옆에서 사소한 심부름도 해 주고, 성적 고민, 친구 고민 등 속마음 이야기까지 함께 나누었어요.  3학년이 되어 반장을 할 때는 정말 많은 도움을 주면서 반을 이끄는 데 힘이 되었고요.  지금은 학생들과 잘 소통하고 열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답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도 연락 잘하고 지내서 그 결혼식 때는 그 당시 고등학교 제자들도 많이 온다고 하네요.  서로 함께 늙어가는 스승과 제자 사이. (사실 학교에 신규 교사들 나이도 이 친구들보다 어린 데 함께 어울리며 늙어가죠.)  같은 길을 선택한 스승과 제자.  그리고 우정, 의리에 관한 내용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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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 저 너머

     없었어도 좋았을 바다가 나에겐 있지 파도가 높은 그 바다는 바람이 거센 그 바다는 외할머니와 나를 나와 엄마와 아빠를 나눠놓는 그 바다는 눈물로 가득 차 있었어 때로 눈물이 피보다 더 진하다는 것 알아 바다가 아니었으면 우린 눈물을 몰랐을 거야 그런데 그 눈물의 바다가 우리를 나눠 놓는 줄 알았는데 그리움으로 안타까움으로 출렁이는 바다 때문에 우린 더욱더 하나가 돼 바다 멀리 있으면 사랑도 먼 줄 알았는데 사랑의 영토는 바다만큼 넓어져 바닷가 바위처럼 우뚝하고 거센 파도를 견딜 만큼 단단해져 그 힘으로 난 싸구려 제빵 기구에 꿈을 구웠지 없었어도 좋았을 바다 덕분에 내 꿈에 날개를 달고 파도를 넘어 거센 바람을 뚫고 그곳이 일본이든 한반도 어느 곳이든 날아갈 거야- 복효근, 「바다 저 너머」* 정광고등학교 정주옥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나는 12살이 되기 전까지 아빠와 떨어져 살았다. 그런다고 해서 부모님께서 이혼하신 건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일본 사람이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한국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화를 내시는 외할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한국으로 온 뒤, 아빠와 결혼하셨다. 엄마는 한국어를 독학하셨다. 그만큼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남성과 결혼을 한 뒤 외할머니께 자랑스러운 남편을 자랑하고 싶어 아빠를 데리고 일본에 가기로 했다.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그냥 한국에서 평생 살고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약간의 기대를 하신 듯했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외할머니를 찾아갔다. 엄마는 외할머니께서 아빠를 싫어하시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외할머니는 오히려 아빠를 반겨 주셨다. 그 당시 아빠는 엄마와 결혼한 뒤 일본어 공부를 막 시작해서 일본어가 서투르셨다. 외할머니는 아빠의 그런 모습이 귀엽다며 아빠에게 많은 대접을 해 주셨다. 그렇게 엄마, 아빠는 일본에서 지내다가 오빠가 태어났다. 그리고 2년 후 엄마와 아빠는 외할머니와 오빠를 데리고 아빠의 여동생들이 있는 광주로 갔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나를 낳으실 때 내 머리가 아래로 향해 있지 않고 위로 향해 있어 제왕절개를 하였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심한 목감기에 걸려있으셔서 제왕절개를 하신 뒤 기침을 하실 때마다 배에 힘이 들어가 상처가 벌어져서 고생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1년 뒤 나와 오빠와 엄마만 일본에 다시 돌아가고, 아빠는 일본에서 일을 못 하시기 때문에 한국에 남으셨다.  오빠와 나에게는 조부모가 외할머니 밖에 안 계셔서 엄마의 엄마가 계시는 일본으로 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외할머니 집에서 200m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서 살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정말 힘이 넘치며 밝은 성격이어서 자주 날뛰었다고 한다. 나는 외할머니 집에 매일 같이 놀러 가 외할머니 집에서 날뛰고 어지럽히다가 치우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말썽꾸러기였다. 초반에 외할머니는 귀여운 손녀가 하는 일은 모든 게 귀엽다며 좋아하셨지만 매일 같이 날뛰는 나에게 지쳐 멀리 이사 가라고 버럭 화를 내셨다. 우리는 할머니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1시간 또 버스 타고 1시간 걸리는 먼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오빠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엄마 혼자 돈을 벌다 보니 가정형편이 어려워 오빠에게 용돈을 많이 못 주고 우리에게 과자를 자주 사 주지 못하셨다. 오빠는 과자를 아껴서 나에게 주곤 했다. 우리 집과 달리 외할머니의 집은 2층 주택에 정말 넓어 집에 복도도 있고 여름방학이면 외할머니집의 옥상에서 바비큐를 하거나 불꽃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주 아팠던 나는 일하는 엄마 대신 외할머니 집에 맡겨져 휴양을 하게 되었고 한동안 외할머니 집에서 지냈다가 다시 집으로 가곤 했다. 아빠는 4년, 6년에 한 번씩 일본에 와 주셨다. 아빠가 오신 첫날에는 내 아빠지만 어색하고 불편하여 내키지 않았지만, 하루가 지나면 금방 친해져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아빠가 일본에 있을 수 있는 기간은 고작 1주일 밖에 없어 즐거운 시간도 금방 지나가 버리고 아빠와 공항까지 가고 헤어지기 직전에 나는 눈물이 나 공항 한가운데서 오열했다. 아빠와 엄마, 오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마음을 꾹 참고 웃는 얼굴로 헤어지려 했지만, 매번 내가 우는 탓에 눈물이 나 버렸다고 한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일본에 놀러 오셨을 때 외할머니와 엄마와 아빠가 진지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그리고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몇 달 뒤 우리는 한국에서 살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이민이 급하게 정해진 일이어서 일본 친구들과 이별 파티를 하고 외할머니는 최대한 우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가 한국으로 갈 때까지 우리 집에서 보내셨다. 나는 한국으로 이사를 하기 싫었지만, 오빠는 좋다며 방방 뛰어다녔다. 그리고 2010년 4월 2일에 오빠와 나는 한국으로 갔다.  엄마는 조금 더 정리할 것이 있다며 6월에 간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엄마가 다시 한국으로 가버린다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셨다. 할머니는 엄마의 손을 꽉 잡고 가지 말라며 우셨지만, 엄마는 할머니를 일본에 두고 가셔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 네 가족은 한국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다문화학교였다. 우리가 일본에서 다니던 학교는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학교였지만 한국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이거 얼마에요.’말고 다른 단어들은 아예 몰랐다. 그러다 보니 5학년 때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않고 오직 한국어만 달달 외우는 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6학년 때 일반 학교에 갔지만, 공부에 잘 따라가지 못해 고생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많은 친구를 사귀고 잘 지냈지만 1학년 겨울에 친했던 친구들이 갑자기 내가 싫다며 학교 폭력을 가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지만, 나한테도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며 조금 더 있으면 다시 화해하고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며 위로를 해 주셨지만 화해하기는커녕 그 무리는 학교가 끝난 방과 후에 나를 따로 부르고 욕을 하고 SNS에 ‘한국에 왜 왔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라.’라는 글을 올리고 단체 대화방에 나를 초대하여 심한 욕설을 퍼붓고 부모님의 욕까지 했다.  나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우울해져 집에서도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나를 본 오빠는 부모님께 내가 이상하다고 말을 하고 내가 학교 폭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들은 신고하라며 화를 냈지만, 나에게는 아직 한 명이지만 나를 받아 주는 친구가 있어 2학년 때까지 참기로 했다. 그 친구가 지금의 절친이다.  그렇게 죽고 싶을 정도의 힘든 시간이 지나고 2학년에 올라갈 때쯤 그 무리는 하나둘 흩어져갔다. 그리고 2학년, 3학년 때는 아무 문제 없이 다른 친구들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만끽했다. 정말 어릴 때부터 제과제빵사가 꿈이었던 나는 제과제빵 학과가 있는 특성화고에 가려 했지만, 성적이 안 돼서 그냥 인문계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3학년 여름방학 때 거의 4년 만에 일본으로 갔다. 외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뵈려고 갔었다. 오랜만에 뵌 외할머니는 우리를 정말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병도 많이 나아지셨다. 며칠 동안 일본에 있던 친구들도 만나고 너무나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대학 진학을 해야 하는 고3이 되었는데 성적은 오르지 않고 넉넉하지 않은 가정 환경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손재주가 있었던 나는 제과제빵을 하는 직업반으로 빠지려고 했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공장에 가서 한쪽에 싸구려 오븐 기구를 장만하여 혼자 제과제빵 하는 연습을 하곤 했다. 직업반으로 가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2학년 때 일본어를 가르치는 담임 선생님과 상담 끝에 대학에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지금은 보충도 듣고 야자도 하고 심지어 토요일에 나와서 자율 학습도 한다. 내 인생 처음으로 공부를 해본다. 비록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과 내 꿈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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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라리 벌

     치마폭에서 놀지 않을래요. 치마폭은 엄마 그림자 안에만 갇혀 있죠. 세탁기 통에서 청바지 지퍼에 끼어 투덜거리거나, 고린내 나는 양말과 속옷 사이에서 이런 운명이 지긋지긋하다며 자맥질할 뿐이죠. 아버지 러닝셔츠나 작업복은 빨랫줄에서부터 기가 죽어 있죠. 그렇게 살다가는 엄마 아빠 꼴 난다는 말, 귀 뚫린 뒤 진저리 치게 들었죠. 내가 왜 불화살 맞은 멧돼지처럼 나도는지 모르죠? 나는 아빠 땀 냄새가 자랑스러웠어요. 엄마가 싸준 김밥과 손뜨개질 한 목도리가 좋았어요. 정말 병아리처럼 엄마 치마폭에서만 살고 싶었죠. 아빠 팔에 매달려 세상 흙탕물을 건너고 싶었어요. 나를 내친 건 엄마 아빠의 불안이에요. 이미 꿈을 팽개친 어른이란 걸 들킨 뒤였죠. 못나서 미안하다고 성질부터 부렸잖아요. 나는 날라리가 아니에요, 날라리 벌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떠돌아다니는 거 아니라고요. 친구들보다 멀리 날아가서 색다른 꽃을 만나고 오죠. 모두 내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질하지만 내가 노니는 드넓은 나라의 꽃과 꿀은 알지 못하죠. 내가 입고 다니는 이상한 옷은 색다른 꽃가루죠. 으스대는 게 아니라 어깨춤을 추는 거예요. 기다려 보세요. 가까운 꽃이 다 져버리면 산 넘고 바다 건너 새 세상으로 안내할게요. 그때는 당당하게 푸른 작업복을 입고 둘러앉아 김밥을 싸요. 나는 날라리가 아니에요. 꿀통에 호기심과 용기가 넘치는 날라리 벌이에요. 꿀만 아니라 돌아오는 길까지 나눌 거예요.- 이정록, 「날라리 벌」* 가좌고등학교 이선영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개학을 하고 이틀이 지나도록 한 놈이 등교하지 않았다. 작년 담임 선생님께 받아 놓은 어머니의 연락처로 전화를 해 보았다. 내일은 꼭 보내겠다는 어머니의 한숨 섞인 다짐과 함께 결석 64일의 생활기록부를 보며 올해는 정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작년 담임 선생님께서도 그 아이의 집까지 찾아가서 새로 만난 담임 선생님과 잘 지내야한다고 단단히 일러두신 듯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들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학교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고 훈수를 둔다. 그러나 정말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모습이 모두 다르듯이 말이다. 이럴 때 나는 대개 그냥 마음을 접는데, 이 아이는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이 새끼가 어디까지 가나 한번 건드려보고 싶었다. 외할머니 댁에서 먹고 자고 하는 이놈을 찾아갔다. 대개 사춘기 아이들은 너무 많은 관심은 피하려고 하고 또 내버려두면 어른들이 관심이 없다며 시비를 건다.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항상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게 아이들이다. 그런데 같은 교무실의 선배 선생님께서, 나는 예전에 애들이 안 오면 집에 찾아가서 직접 데리고 왔었어. 집에 한두 번 가기 시작하면 부모도, 아이도 달라지더라고. 정말일까? 외할머니의 아침 운동과 더불어 나도 매일 그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등교하기 시작했다. 현관 비밀번호까지 틀 정도가 되었고. 매일 불같이 쳐들어가서 너 같은 새끼는 이불을 덮고 잘 자격도 없다며 이불을 빼버리기도 했다. 어떤 날은 순순히 따라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도망을 쳐버리기도 했다. 고통의 나날은 쌓여만 갔다. 수능은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수능이 끝날 때까지 담배 한 번을 안 피우고 시험을 보았다. 이게 그동안 고생한 담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나. 물론 결과는 엉망이었다. ...결국 대학을 보냈다. 세상에나 운도 좋은 새끼. 지방대학이긴 하지만 그동안 알바로 갈고 닦은 사장님을 홀리는 솜씨로 면접을 보고 대학에 척하니 합격을 하였고,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던 그 비인기학과는 경찰행정학과로 편입되었다. 운 좋은 새끼. 경찰서에 그렇게 들락거리더니 경찰행정학과래. 1월 1일.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대학 안 다닐래요. 너는 정초부터 선생님한테 전화를 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라고 말해도 시원찮을 판에 보내놓은 대학을 안 다닌다고? 미쳤구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야? 전화기 너머로 우는 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저 20분에 한 번씩 그냥 화가 나요. 병이구나. 내 새끼가 병이었구나. 그냥 반항기에 하는 소리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래, 아들아. 선생님이 미안해. 화가 나는데 참고 전화를 해줘서 고맙구나. 얘기할 데가 없어요. 엄마가 걱정하실까봐 말을 못 하겠어요. 그래. 나한테는 괜찮아.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니까 난 걱정 안 해. 잠이 안 오고 불안해서 술을 먹고 동이 트면 잠이 들고, 내가 아침부터 들이닥쳐서 등짝을 때려가며 깨워서 죄인처럼 등교했던 시간들이. 서로에게 스쳐갔다. 교사는 부모여야 하고, 때로는 친구여야 하고, 또 철저하게 제3자로서 기능해야 한다. 3년이 지났다. 졸업을 하고도 몇 차례 연락이 와서 고민을 털어놓고 나도 걱정이 되곤 했지만. 이제는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세상에 잘 적응을 하는 것 같다. 다행이고 기쁘다. 17년 전의 나는 아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인생에 귀감이 되는, 평생 아이들의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조금 달라졌다. 졸업한 아이들한테 연락이 자꾸 오면 불안하다. 나는 스쳐가는 교사이고 싶다. 아이들에게 평생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 부담스럽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꾸려가는데 자꾸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미운오리새끼들이 하나 둘 나의 품을 떠나는 즐거움과 보람으로 쿨 하게 살고 싶다. 나는 아이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지는 교사가 아니다. 나는 그냥 내 삶이 행복한 인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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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와 늘보

     하루 한 번은 나무 위에서 수업해요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마음에 드는 가지에 앉아 나뭇잎을 읽어요 또박또박 햇살이 쓴 이야기를요 눈감고 바람의 속삭임을 듣는 것도 재미있을 거예요 조잘조잘 먼 곳에서 담아온 이야기를요 이도 저도 싫으면 하품 길게 하고 낮잠을 자요 달달한 꿈으로 피로를 녹여요 하루 한 번은 시계를 보지 않아도 되는 수업을 해요 나무의 시간에 맞춰 천천히가 되어요 빨리 하느라 놓쳐버린 것들과 멀게만 느껴지는 나를 찾는 수업을 해요- 이장근, 「나무와 늘보」* 대구동부고등학교 민호기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여유로움’을 배우다 - 북카페를 가다                                                                                                                                                   동부기자단 동아리 반장 김세윤 4월 초. 봄비가 내린다.  서먹서먹하던 3월을 보내고 처음으로 동아리 반일제를 나가는 날이다. 첫 동아리 반일제 활동이 의미 있고 기대가 됐던 이유는, 교지부에 처음 들어와 3월 내내 했던 계획 세우기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동부 기자단’이라는 동아리 명에 걸맞게 직접 현장에 나가 직접 사진도 찍고 내용도 조사하기로 한 것. 정확하게는 대구 근대화 골목을 다니며 조별로 맡은 주제를 취재하는 것이고.  하지만 지난주까지 무덥기까지 하던 기온(26도)이 아침부터 급강하했다.(5도) 빗줄기는 굵어지고 시작했고 바람마저 심하게 부는 상황. 이런 배려 없는 봄비 탓에 주로 야외를 다녀야하는 근대 골목 취재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비가 와서 운치 있는 근대 골목을 찍어도 예쁠 것 같기도 했지만, 날씨를 탓하는 친구들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벌써 들려오고 있었다.  문제를 들고 동아리 담당 선생님께 찾아갔다. 회의 결과, 근대 골목 취재는 시원한 가을로 미루고 2.28민주화운동기념회관(2.28도서관)에 갈 것인지, 아니면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구 혁신도시에 있는 북카페에 갈 것인지를 투표를 통해 정하기로 했다. 투표 결과 다행히 모든 친구들이 돈을 가지고 있거나 돈을 빌릴 수 있어서 근처 북카페로 결정. 하지만 슬프게도 검색해낸 북카페까지는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다. 걸어서 15~20분 거리. 어쩔 수 없이 짓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도보를 선택했다.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부는 날씨에 심지어 우산이 없는 친구도 있어 함께 써야만 했다. 옷조차 얇게 입은 24명의 여학생들이 몇 개의 우산에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앞에서 선생님이 인솔해주시고 친구들이 줄을 서서 걸어가는 모습이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는 모습과 비슷해서 한편으로는 기분이 들뜨고 그랬다. 다들 그래서였나, 심한 바람에 친구의 우산이 뒤집어져도 험악한 날씨와는 반대로 모두들 깔깔 웃었다. 그렇게 비를 맞고 웃으면서 북카페(만화카페)에 도착을 했다.  사실 북카페가 처음이다. 기대 이상으로 시설이 깔끔하고 편리했다. 사다리 계단을 통해 올라간 복층 공간에서 단칸방 소파, 테이블 좌석까지 취향대로 골라서 눕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학습 만화 · 애니 · 순정 만화 · 웹툰 등 종류별로 다양한 독서 취향에 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오로지 공부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바쁘고 버거운 일상을 보내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3시간. 그 여유로움과 한껏 어울리는 곳이었다. 가자마자 신발을 벗고 책장을 스캔하며 복층 다락방에 가방과 짐을 풀고 3시간 권을 결제를 했다. 그리고는 웹툰이 있는 책장으로 가서 그동안 보고 싶었던 웹툰을 여러 권 뽑아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옆에 책을 쌓아 놓고 가장 편한 자세로 책을 보는데 1시간이 그렇게 느긋하게 간 적은 오랜만이었던 거 같다. 선생님께서도 “아 얼마만의 여유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여기로 들어 온 순간 시계 바늘에 돌이라도 달아 놓은 듯 2배로 느리게 흘렀다.  한 30분 정도 책을 읽었는지 목이 점점 마르기 시작하여 3시간 권에 포함되어 있던 아이스티와 과자를 하나 더 주문을 해서 다시 자리에 누웠다. 주문한 아이스티가 나왔는데 빨대 모양도 핑크색 하트인 게 예뻐서 친구랑 사진도 찍고 그렇게 놀았다. 한참 읽고 먹고 떠드느라 지쳤는지 잠이 솔솔 와서 잠깐 눈을 붙였다. 그렇게 놀고 자고 먹고 읽고 떠들었는데도 3시간이 그렇게나 천천히 가다니. 시험이 끝난 날 북카페에 와서 하루 종일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가던 3시간이 지나고 동아리 시간을 꽉 채워서 마쳤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비록 비가 와서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한 하루였지만 바쁜 생활에서 잠깐의 여유를 찾게 해 준 2018 첫 동아리 반일제 활동은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활동으로 잊지 못할 것 같다.

    맞춤 제작 시
  • 우리들 꽃말

     한 잎 한 잎 바이러스가 날린다 옮는다 퍼진다 머리에 눈에 마음에 손에 손에 카메라에 ‘절세미인’ 꽃말을 가진 벚꽃 바이러스에 감염돼서는 벚꽃보다 내가 더 예쁘다고 우리가 꽃이라고 곳곳에 꽃무리 치유불가다 ‘나’의 꽃말은 ‘행복한 아이’ ‘우리들’ 꽃말은 ‘오늘을 영원히!’ 내년 바이러스가 피는 그날까지 앓기를, 뜨거운 열꽃이 피기를- 김미희, 「우리들 꽃말」* 해운대여자고등학교 이영주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저희 학교는 꽃이 피는 봄이 되면 항상 벚꽃이 멋들어지게 피는 곳입니다. 짧은 등굣길이지만 교문에서부터 운동장까지 가파른 오르막 옆으로 벚나무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이 때즘 여고생의 감성을 가진 아이들이 항상 쉬는 시간에 뛰어나와 끼리끼리 사진을 찍습니다. 벚꽃을 주워다 책갈피를 만들기도 하고 머리에 꽂으며 행복해 하기도 교사에게 나눠주기도 합니다. 특정한 아이들 몇 명만이 아니라 전교생이 그러죠. 어느 해부턴가 담임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찍는 반이 생겨나면서 불문율처럼 꼭 사진을 함께 찍어야 합니다. 급기야 올해는 ‘꽃보다고운’이라고 정해서 아예 반별로 꽃을 테마로 사진을 찍고 전시도 하고 멋진 사진을 찍은 반은 피자를 쏘는 이벤트도 했어요. 1-2시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봄을 만끽하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더군요. 힘든 고등학교 시절에 예쁜 추억이 될 것 같아요.

    맞춤 제작 시
  • 맞춤 제작 시는...

     맞춤 제작 시는 마치 맞춤옷처럼 선생님의 마음에 ‘꼭 맞춘 듯한’ 시를 선물해 드리는 메뉴입니다. 창비 출판사를 통해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들이 매월 선정된 사연을 바탕으로 시를 창작한 후 사연과 함께 게재합니다. 시는 나눌 때 더 감동이 커지는 것처럼, 사연을 올리신 선생님은 물론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했던 다른 선생님들께도 큰 위로와 즐거움으로 다가가길 바랍니다. 맞춤 제작 시 신청 게시판을 통해 학교에서 겪은 선생님들의 다양하고 재미난 사연을 자유롭게 올려 주세요. 오늘도 한 편의 시처럼 살아가는 모든 선생님들을 시요일스쿨이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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